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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청와대 금고의 비밀

권숙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3-28 17:33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6)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청와대 금고에서 나온 9억 5000만 원은 대통령의 통치자금이었다. 그 금고는 내가 6년간 관리했다. 금고 안에는 비서실장의 판공비도 있었다. 나는 분기별이나 두 달에 한 번씩 대통령으로부터 자금을 타 와서 금고에 보관하면서 월정 지출과 지시에 따른 지출을 집행했다.

대통령의 통치자금은 경제인들의 성금으로 충당되었다. 1970년대는 국가 경제 기반이 구축되는 시기로, 아직 빈곤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해 국가재정이 어려웠다. 대통령 통치자금도 마찬가지였다. 정부 예산에 책정된 정보비, 판공비, 기밀비, 접대비 등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기업인들의 성금에 의한 충당이 불가피한 실정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얼마를 어떻게 성금으로 받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통치자금이 되기도 하고 부정축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같은 물이라도 사람이 마시면 생명수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순수한 성금이냐, 인·허가나 이권과 관련된 거래냐. 위협과 협박에 의한 억지 기부냐, 공적 루트를 통한 성금 접수냐. 자녀 친지 등 비선을 통한 접수냐, 대통령 직접 수수냐. 성금으로서 적정한 액수냐, 천문학적인 액수냐. 공적 또는 국가․사회적 필요에 대한 사용이냐, 사적 호화 지출 내지는 축재형 유용이냐. 유산이 있느냐, 없느냐 등에 따라 통치자금과 부정축재가 구분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박 대통령의 통치자금은 한 점 부끄러움 없다고 확신한다. 역대 대통령들의 행태를 본다면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당시 김정염 비서실장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우고 성금을 운용했다.

 △정부시책에 힘입어 이익을 많이 낸 매출 순위 20대 기업으로 한정한 자발적인 성금 △농민, 어민을 대상으로 하는 비료 농약 사료 등 농수산 관련업체 제외(이익을 가급적 농어민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 △20대 기업 내에서도 이익이 나지 않은 기업은 제외 △인·허가 및 이권 관련 대가성과 강제성 철저 배격 △대통령 가족 친지 등을 통한 비선 헌금 철저 봉쇄 △헌금에 따른 혼선과 잡음 방지를 위해 비서실장 단일 창구 유지.

김 실장은 “대통령의 통치자금이 너무 풍족하면 자칫 국가 부패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빠듯하게, 절제되어야 한다”고 나에게 강조한바 있다. 박 대통령도 이 원칙에 따라 썼다. 일상생활의 근검절약 그대로였다. 김 실장 재직 9년 동안 돈 문제로 불미스런 일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00여 명의 고용원(운전기사, 청소원, 기계공, 식당요원 등)을 포함하여 총원 320명 내외가 청와대 비서실 직원의 전부였다. 최소한의 정예 요원이었고 필요시 태스크포스(TF)를 운용했다. 그리고 약 10년간 예산 동결령이 내려져 있었다. 전기·냉난방 절약도 솔선수범했다.

그 많았던 대통령 지방출장비용도 정부 예산이 아닌, 내가 관리했던 자금에서 지출되었다. 각 수석비서관실의 특별활동비도 이 자금에서 나갔다. 각종 하사금, 격려금, 부처에 대한 특별지원금도 마찬가지였다. 예산국회 때는 그 대책비가 경제기획원장관에게 하달되었고 세수 확보 격려금도 국세청에 주어졌다.
 
과학재단, KAIST 등 나라의 주요 재단이 발족될 경우는 그 발기 출연금이 기부되었다. 문교부의 학원대책비, 새마을지도자 격려금, 군인 경찰 등 안보 관계자에 대한 격려금도 여기에 포함됐다. 새마을·국방 성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외 통치자금 사용 사례 몇 가지.

△한 재벌이 미화표시 100만 달러의 수표를 성금으로 보내왔다. “재향군인회가 어렵다는데 그 기금으로 쓰도록 전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나는 이 수표를 외환은행에서 교환, 재향군인회장에게 전달한 바 있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발생된 뒤 프랑스를 중심한 서유럽 한국 유학생들에 대한 북한 매수 차단 대책이 시급할 때 이들을 위한 장학기금(윤석헌 주불대사 건의) 설립 금으로 1차 30만 달러를 보낸데 이어 연차적으로 지원하였다.  

△사우디 근로자가 5만 명에 이르는 등 중동 특수가 절정일 때 원활한 공사 및 수주 지원과 근로자 지원을 위한 특별활동비로 5만 달러를 유양수 대사에게 송금.

△군 출신 C 대사의 자녀 학자금 지원 요청을 받고 3만 달러 송금.

△남베트남(월남) 패망 후 현지에 억류된 이대용 공사의 무사귀환을 위해 박 대통령은 여러 차례 격려의 서신과 함께 비상 활동금을 보냈고 이 공사를 돕고 있던 현지 교민회장 등 관계자에게 활동 격려금을 보냈음.

△그밖에 나는 중병으로 입원중인 장관들에 대한 대통령의 문병 및 위로금 전달 심부름을 몇 차례 했다. 어려운 군 원로들의 생계비를 지원했고 대구사범 동기생인 석광선의 폐암 치료비도 지원했다. 나는 폐암 치료 경과를 매달 대통령께 보고했고 치료비를 정산했다.

박 대통령의 청렴은 M16 소총 무기상의 증언으로 세상에 드러난 바 있다. M16 소총을 도입했을 때 무기상이 그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내놓았는데 이를 돌려주면서 그만큼의 소총을 더 달라고 한 박 대통령의 일화는 세계 무기상들에게 전설이 되었다.

1970년대 섬유재벌이었던 대농 박용학 회장의 개인 수표가 금고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나는 그 처리지침을 상신했다. “요즘 그 회사 어렵다는데 도로 돌려주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박 회장에게 돌려준 일이 있었다. 대통령 성금에 대해 부도(?)를 낸 일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1977년 어느 날 김정염 비서실장이 500만 원이 든 봉투를 나에게 주면서 “집으로 보내온 것인데 마음만 고맙게 받겠으니 정중히 돌려주라”고 해 동양그룹 이양구 회장에게 돌려주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 서거 후 전두환의 보안사령부는 김정염 실장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 수사했다. 그 경위는 이렇다.

보안사는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해 김종필, 김용태, 박종규 등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구속 수사했다.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주일대사로 나가 있던 김정염은 해임되어 귀국, 칩거 중이었다. 어느 날 이원조가 나를 만나자고 했다. 제일은행 상무 출신인 이원조는 전두환·노태우와 친구 사이었고 10·26 이후 전두환의 경제비서관을 거쳐 노태우 때에는 금융감독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금융황제’로 행세했다. 다음은 이원조와 만나 나눈 대화.  

“김 실장의 자금이 명동사채시장에 유통되고 있다는데 알고 있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전혀 근거 없는 모략이다. 말도 되지 않는다. 생사람 잡지 말라. 후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짧은 대화를 마치고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뒤 김 실장이 보안사에 연행되어 조사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필시 모략 때문이라고 직감했다. 며칠이 지나서 그의 요청으로 또 만났다. 다시 대화 내용.

“권형(필자를 지칭) 큰일 났다. 조사를 해 보았는데 전혀 나오는 게 없다. 머리가 정말 좋더라. 뭐는 언제 무슨 명목으로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소상히 기억하고 있더라. 정보가 있으면 좀 알려 달라.”

“거 봐라. 처음부터 잘못 짚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속히 석방하고 잘못을 반성하라.”

역시 두어마디 대화 끝에 헤어졌다. 그런데 며칠 뒤 나와 친구 사이인 보안사 권정달 정보처장이 점심을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다. 효자동 입구 한식집에 나갔더니 보안사 이학봉 수사처장과 함께 나와 있었다. 이번엔 이 처장과의 대화내용이다.

“큰일 났다. 조사를 해도 나오는 것이 없다.”

“처음부터 당신들이 잘못 짚은 것이다. 그분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청백리다. 부친이 은행 두취(은행장)를 지낸 유복한 가정이다. 돈을 탐할 분이 아니다. 빨리 없던 일로 하고 석방하라.”

“그럴 때는 지났다. 이제 체면 문제다.”

“과오를 과오로 덮을 생각을 말아라. 그분을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된다. 제발 전두환 사령관께 말씀드려 선처해 달라.”

그렇게 점심을 마치고 일어섰다. 골목을 나오면서 나는 친구 권정달에게 다시 한 번 간곡한 부탁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그들은 그분에게 손찌검까지 했다는 험한 얘기를 먼 훗날 들었다. 이무렵 소위 신군부의 인너서클에서 나에 대해서도 조사대상으로 거론했다는 것이다. 우연이 그 자리에 참석했던 청와대 경호실 김영호 통신처장(육사12기생)이 “권아무게는 반듯하고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변호하였다는 사실을 10여년이 지난 뒤에 전해 들었다. 김처장이 LG구릅의 통신회사 사장으로 재직할 때 내 친구인 김민희 광고회사 사장에게 전한 얘기였다. 나는 1986년까지 청와대 사정비서실의 감시와 도청을 당하면서 마음고생을 했었다. 그들은 수많은 산업기지건설 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건설의 책임자였던 오원철 경제 2 수석비서관에 대하여 일찌감치 부정축재 혐의를 씌워 수사를 벌이면서 강압과 학대를 다했다. 오수석은 박대통령께서 국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산업기획설계자이며 군전력증강사업(율곡사업).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책임자로 효율성과 경제성에 맞추어 열심히 일한 청백리였다.  

무도한 폭거였다. 그들은 정의사회를 구현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천문학적 액수의 부정축재로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온 국민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앞서 밝혔듯 박 대통령 서거 후 청와대 금고에서 나온 9억 5000만 원은 대통령 통치자금의 잔금이다. 대통령께서 남긴 유산인 셈이다. 당연히 유족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그러나 엄격히 분별한다면 이중 4억 원은 김계원 비서실장의 비자금이었다. 김 실장이 1년 동안 쓸 판공비적 성격이었다. 나는 이 자금을 김 실장에게 돌려주기보다는 전체를 대통령 통치자금으로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하고 전액을 유족에게 전달했다.

큰 영애 박근혜는 그중 3억 5000만 원을 박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비에 보태 쓰라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전했다. 3억 5000만 원을 받은 전 사령관은 계엄업무수행지원금조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1억 원,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5000만 원을 전하고 2억 원은 자신이 썼다. 나머지 6억 원은 후원금이 끊겨 경영이 어려워진 무료 노인한방병원 운영비로 쓰였다는 사실을 뒷날 알았다.

이 9억 5000만 원을 둘러싼 말썽은 박 대통령 서거 후 30년여 동안 계속되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5공 청산을 하면서 이 9억 5000만 원이 다시 문제가 된 바 있다. 나는 검찰에 불려가 사실 확인을 위한 참고인 진술서를 다시 써준 일이 있었다. 이때 검찰과 나는 ‘국고에 환수되어야 할 돈’이라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청와대 금고에서 직접 가져간 것이란 진술을 강요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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